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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벤더 향 오래도록 - 크로아티아 흐바르 섬 여행기

안토니오 아주머니가 손에 쥐어 준 흐바르의 여름 향기

  • 양미석
  • 입력 2022.09.26 15:28
  • 수정 2022.11.03 18:42

좀 돌아가지만 완만한 오르막길과 짧지만 가파른 계단.

어느 길로 갈까. 배를 타고 오는 내내 고민했는데 흐바르 항구에 발을 딛자마자 ‘얼른 숙소에 짐을 던져두고 이 날씨를 마음껏 누리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렇다면 지름길인 계단으로!

마을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요새 바로 아래 쪽에 있는 숙소까지 올라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숙소 안쪽을 향해 “계세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도착을 알렸고 곧 하얀 앞치마를 입은 중년 여성이 잰걸음으로 뛰어 나왔다. 은퇴 후 에어비앤비를 운영하고 있다는 안토니아와 마르코 부부. 남편이 외출 중이어서 항구로 마중 나가지 못했다며 미안해하는 안토니아 아주머니는 넘치는 에너지로 여행자를 맞아주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양’ 맞죠? 배가 시간 맞춰 잘 도착했군요! 요새 날씨가 진짜 좋아요. 아, 배낭은 여기 내려놓고, 생수랑 탄산수 있는데 뭐 마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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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까지 띄워준 탄산수를 들이키고 나서야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사진이랑 똑같잖아! 활짝 열린 응접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흐바르 타운과 바다. 실내를 둘러싼 큼직한 초록 화분들과 벽에 걸린 자전거까지 완벽했다. 덕분에 앞으로 닷새 동안 머물 방에 대한 기대감도 커져 갔다.

흐바르 섬에서 머물렀던 에어비앤비 
흐바르 섬에서 머물렀던 에어비앤비 

크로아티아에 있는 7백 개가 넘는 섬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흐바르 섬(Hvar). 처음 왔을 땐 당일치기, 두 번째는 1박 2일, 그리고 세 번째 방문인 이번엔 닷새를 머물기로 했다. 섬의 중심지인 흐바르 타운은 한 바퀴 둘러보는 데 두 세 시간이면 넘칠 정도로 아담하지만 해수욕, 푸른 동굴 투어, 요트 투어 등 섬에 있을 동안 지루할 틈이 없다. 한여름이면 라벤더 축제가 열리고 해변에 위치한 클럽을 방문하는 젊은 여행자들로 ‘크로아티아의 이비자’로 불릴 정도로 들썩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성수기가 지난 9월 말에 섬을 찾은 여행자는 그저 쉬고 싶었다. 꽉 찬 3개월 여정의 중간 쯤, 휴식이 필요한 시기였다.

지난 번엔 항구 바로 앞 호스텔의 3층 침대에서 나보다 열 살은 어린 것 같은 친구들과 고단한 밤을 보냈다. 그래, 하룻밤이니까 괜찮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숙소 선정에 무엇보다 공을 들였다. 흐바르는 섬이라 물가가 비싼 편이다. 고급 리조트와 독채 숙소는 제외. 조용하고 깨끗한 건 기본, 명소랑 해변, 시장에서 멀지 않으면 좋겠고 호스트와 거리감도 적당한 그런 공간을 찾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여러 명의 호스트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 숙소를 선택한 이유는 독특한 구조 때문. 경사를 자연스레 이용해 2층 구조로 지어진 건물인데 1층 현관은 계단 방향으로, 2층 현관은 완만한 오르막길 방향으로 나 있었다. 1층은 호스트의 생활공간이고 2층은 게스트를 위한 네 개의 방. 2층 현관만 쓴다면 호스트와 마주칠 일도 거의 없이 조용히 지내다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안토니아 아주머니는 어찌나 살뜰하고 눈치가 빠른지, 언제 2층으로 올라오는지 알 길이 없는데 응접실이며 작은 주방까지 항상 말끔한 상태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굳이 1층까지 내려오지 말고 채팅으로 이야기하라는 쿨함까지. ‘적당한 거리감’을 위해 부러 노력할 필요 없어 마음이 한층 더 가벼웠다.

4년 만에 흐바르에 왔으니 도착한 첫 날엔 ‘요정들이 노닌다는’ 요새에도 올라갔다가 마을의 서쪽 끝에 있는 해변까지 걸어가 노을을 한없이 바라봤다가 전통주를 서비스로 내주는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저녁식사도 즐겼다. 하지만 내 방 베란다에서 보이는 풍경 덕분에 둘째 날부터는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었다. 장보기 겸 산책을 위해 짧은 외출을 했을 뿐 여기까지 와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창을 활짝 열면 침대 위에서도 흐바르 타운과 바다, 파클레니 제도(Paklinski otoci)가 눈에 들어왔다.

방에서 내려다 본 풍경
방에서 내려다 본 풍경

외식하지 않는 날이면 식사는 모두 베란다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서 먹었다. 취사가 가능한 숙소는 아니었지만 따로 불을 쓸 일은 없었다. 여름에 크로아티아에 올 때 마다 잔뜩 사 먹은 다디단 베리류가 없어도 노천 시장엔 항상 신선한 농산물이 가득해 별다른 드레싱이 없어도 샐러드가 맛있었다. 가끔은 전기 주전자에 물을 팔팔 끓여 귀한 비상식량인 컵라면과 누룽지를 먹었다. 높은 곳에서 먹는 라면은 역시 최고야, 라면서.

조금 다른 시야의 풍경을 보고 싶을 땐 응접실의 넓은 테이블에 노트북을 펴 놓고 아무 의미 없는 글을 끼적였다. 안토니아 아주머니와 몇 번 마주쳤는데 글을 쓰는 날 힐끗 보더니 조용히 허브차를 가져다 주실 뿐이었다. 영역을 넘어오지 않는 조용한 배려가 새삼 고마웠다. 

성실한 9월의 태양과 바다의 환영 속에 흐바르 섬에 도착한 여행자는 한껏 게으름을 피우다 10월부터 4월까지 긴 휴식에 들어가는 숙소의 그해 마지막 손님으로 체크아웃을 했다. 떠나는 날엔 마르코 아저씨가 항구까지 태워다 주기로 했다.

2층 현관에서 헤어진 안토니아 아주머니는 마지막 손님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작은 라벤더 향주머니를 손에 쥐어 주었다. 직접 말린 라벤더 꽃잎이 들어간 향주머니는 여행을 마치고 귀국해서까지 길고 길게 흐바르의 여름 냄새를 배낭에 남겨주었다.

흐바르 항구에서 바라본 요새
흐바르 항구에서 바라본 요새
여행작가 양미석 : 한 번에 한 나라, 한 도시만 느릿느릿 둘러보며 30년 일정으로 세계 일주 중. 사랑하는 곳에 대해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어쩌다 보니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있다. 여행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간절히 바란 적은 없지만, 막상 여행 작가가 되고 보니 이젠 다른 일을 하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다. 책 작업을 할 때 가장 즐겁고 자신이 쓴 책을 읽고 여행을 다녀온 독자를 만날 때 가장 기쁘다. , , , 를 썼다.
여행작가 양미석 : 한 번에 한 나라, 한 도시만 느릿느릿 둘러보며 30년 일정으로 세계 일주 중. 사랑하는 곳에 대해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어쩌다 보니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있다. 여행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간절히 바란 적은 없지만, 막상 여행 작가가 되고 보니 이젠 다른 일을 하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다. 책 작업을 할 때 가장 즐겁고 자신이 쓴 책을 읽고 여행을 다녀온 독자를 만날 때 가장 기쁘다. , , , 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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